‘재’로 남은 뭉크의 슬픈 사랑 [으른들의 미술사]

뭉크, ‘재 I’, 1896, 석판화, 29.6x43cm, 개인소장.
전나무가 빽빽한 숲속에 두 남녀가 있다. 화면 아래 남성이 고개 숙이고 여성은 이제 막 옷을 입으려는 참이다. 붉은색 옷을 입은 여성은 옷을 추스르고 있고 남성은 머리를 감싸 깊은 후회를 하는 중이다.

뭉크의 사랑 작품에는 사랑의 환희와 수치심이라는 서로 다른 감정이 공존한다. 뭉크는 불타오르는 사랑이 재가 된 순간을 그렸다.

뭉크는 밀리와 처음 사랑을 나눴던 기억을 ‘굴욕감, 엄청난 피로와 슬픔’으로 기록해 두었다. 따라서 화면 아래 머리를 감싸고 큰 슬픔에 빠진 남자는 뭉크 자신이었다.

어둠, 숲속, 그리고 달빛 아래뭉크와 밀리와의 사랑은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관계였다. 따라서 뭉크의 첫사랑에 대한 기억은 어둠, 숲속, 달빛 아래였다. ‘재’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 역시 숲속에서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축복받지 못한 사랑을 시작한 뭉크는 죄의식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반면 우뚝 솟은 여성의 모습은 남성을 지배하고도 남는다. 밀리는 뭉크보다 세 살 연상이었으며, 돈도 더 많았고, 경험도 더 많았다. 밀리가 사랑의 주도권을 쥔 상태에서 여성은 능동적이고 남성은 수동적이다. ‘재’(Ashes)는 바로 뭉크와 밀리의 힘의 역학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뭉크, ‘재 II’, 석판화, 45.4x59.9cm, 개인소장.
강한 여성과 나약한 남성머리를 감싸고 있는 뭉크와 밀리의 자세는 연극적이다. 여성은 강하고 남성은 나약하다. 이는 전통적인 성 역할을 바꾼 것이다. 세기말의 데카당 감성은 팜므 파탈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이는 여성이 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성을 끝내 파멸시킨다는 의미다. 클림트의 ‘유디트’는 대표적인 팜므 파탈 도상이다.

밀리와의 사랑을 끝낸 후 뭉크에게 두려움과 죄책감이 몰려왔다. 때문에 이 작품에 남는 것은 공허함, 나약함, 두려움, 욕망, 수치심, 절망이다. 뭉크는 밀리와 사랑에 빠진 후 원인 모를 슬픔에 빠졌다. 뭉크에게 남은 것은 깊은 후회뿐이다. 어느덧 후회는 두려움으로, 공포로 변했다.

두 남녀를 그린 ‘재’의 원래 제목은 ‘타락 이후’였다. 아픈 상처만을 남긴 밀리와의 사랑 이야기는 입안에 재를 한가득 머금은 듯 뒷맛이 썼다.

<편집자주> 서울신문사는 올해 창간 12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에드바르 뭉크 전시 ‘비욘드 더 스크림’(Beyond The Scream)을 오는 5월 22일부터 9월 19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한다. 올해는 뭉크가 사망한 지 80주기를 맞이하는 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