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체른 사자상에 남겨진 스위스의 흑역사 [한ZOOM]
업데이트 2023 12 08 08:31
입력 2023 12 07 09:31
스위스 루체른(Luzern)에 있는 ‘빈사의 사자상’은 1792년 튈르리 궁전에서 프랑스 혁명군을 상대로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멸한 스위스 용병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석상이다.
게르만족은 엄격한 장자상속(長子相續)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가 아닌 아들은 집을 떠나 스스로 먹고살 길을 찾아야 했다. 동화책에 떠돌이 왕자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독사과를 먹고 쓰러져 있던 백설공주를 살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왕자 역시 먹고 살길을 찾아 떠나던, 첫째가 아닌 아들이었다.
먹고 살길을 찾아 집을 떠난 청년들이 가장 선호하던 직업은 용병(傭兵)이었다. 왕이나 영주에게 소속된 직업 군인이 되면 안정적인 수입과 명예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스위스 출신 용병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지금의 스위스는 선진국이지만, 과거의 스위스는 험준한 알프스 산맥과 호수가 전부이며, 농사지을 토지가 부족한 가난한 나라였다. 그래서 스위스 청년들은 먹고 살기 위해 유럽 각국으로 넘어가 용병이 되었다.
이들은 용병이 아니면 먹고살 길이 없었고, 스위스 용병의 이미지가 나빠지면 다음 세대가 용병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막힌다는 생각으로 고용한 왕과 영주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렇게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스위스 용병의 인기는 높아져갔고, 스위스 용병을 선호하는 전통은 지금도 남아 교황이 있는 바티칸시국에서는 스위스 근위대가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루체른에는 이 도시의 상징이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다리로 유명한 ‘카펠교’가 있다. 다리 지붕에는 스위스와 루체른의 역사적 순간을 담은 그림이 걸려있다.
스위스 중부에 있는 루체른(Luzern)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다리 ‘카펠교’(Chapel Bridge)가 있다. 약 300m 길이의 다리의 지붕 안에는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담은 약 120점의 그림이 걸려있다. 다리의 가운데에는 탑이 있는데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포로를 감금하고 고문하던 반전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카펠교 지붕에는 스위스와 루체른의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담은 약 120점의 그림이 걸려있다. 사진: 루체른 홈페이지. 카펠교 지붕에는 스위스와 루체른의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담은 약 120점의 그림이 걸려있다. 사진: 루체른 홈페이지.](https://imgnn.seoul.co.kr//img/upload/2023/12/07/SSI_20231207092337.jpg)
카펠교 지붕에는 스위스와 루체른의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담은 약 120점의 그림이 걸려있다. 사진: 루체른 홈페이지.
덴마크 출신 ‘베르텔 토르발센’의 설계하고, 독일 출신 ‘루카스 아호른’이 작업한 빈사의 사자상(瀕死의 獅子像)은 전투에서 쓰러진 사자의 모습을 자연바위를 조각해 만든 작품이다.
‘빈사의 사자상’(瀕死의 獅子像)은 덴마크 출신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Bertel Thorvaldsen, 1770~1844)’이 설계하고, 독일 출신 조각가 ‘루카스 아호른(Lukas Ahorn, 1790~1856)’이 거대한 자연석에 가로 10m, 세로 6m로 조각해서 만든 작품이다.
빈사(瀕死)는 위독한 병이나 심각한 상처 때문에 죽음에 이른 상태를 의미한다. 빈사의 사자상은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쓰러져간 용맹한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1792년 튈르리 궁전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 혁명군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멸한 스위스 용병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은 빈사의 사자상을 두고 ‘전 세계에서 가장 감동적인 작품이다’라고 평가했다.
1789년 10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 부부는 ‘베르사유 궁전’을 떠나 파리 시내에 있는 ‘튈르리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곳에서 시민혁명군의 감시를 받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국왕부부는 1791년 6월 왕당파 군대가 모여 있는 파리 북동쪽 ‘몽메디(Montmédy)’로 탈출을 시도했다가 ‘바렌(Varennes)’에서 붙잡혔다.
![장 뒤플레시스 베르토(Jean Duplessis-Bertaux, 1747~1819) 작품 ‘튈르리 궁전의 습격’. 장 뒤플레시스 베르토(Jean Duplessis-Bertaux, 1747~1819) 작품 ‘튈르리 궁전의 습격’.](https://imgnn.seoul.co.kr//img/upload/2023/12/07/SSI_20231207092618.jpg)
장 뒤플레시스 베르토(Jean Duplessis-Bertaux, 1747~1819) 작품 ‘튈르리 궁전의 습격’.
1792년 8월, 시민혁명군이 국왕부부를 끌어내기 위해 튈르리 궁전을 공격했다.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맹세했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갔고, 국왕부부의 주변에는 약 800명의 스위스 근위대만 남아 있었다.
스위스 근위대는 시민혁명군에 비해 모든 것이 부족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만약 자신들이 도망간다면 더 이상 비겁한 스위스 용병을 고용할 곳은 없을 것이며, 끝까지 국왕부부를 지킨다면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스위스 용병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스위스 용병을 선호하는 전통은 지금도 남아 교황이 있는 바티칸시국에서는 스위스 근위대가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스위스 용병을 선호하는 전통은 지금도 남아 교황이 있는 바티칸시국에서는 스위스 근위대가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https://imgnn.seoul.co.kr//img/upload/2023/12/07/SSI_20231207092933.jpg)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스위스 용병을 선호하는 전통은 지금도 남아 교황이 있는 바티칸시국에서는 스위스 근위대가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먹고 살 것이 없어 용병을 수출하던 가난한 나라 스위스. 흑역사를 가진 이 나라는 시간이 흘러 선진국이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나라가 되었다. 대한민국도 스위스처럼 먹고살 것이 없어 미국으로, 중동으로, 유럽으로 일꾼을 수출하다가 이제 선진국 대열에 오른 나라가 되었다. 이제는 우리도 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역사적 작업을 해야하지 않을까? 빈사의 사자상에서 가슴에 숙제를 안고 발길을 돌렸다.
한정구 칼럼니스트 deeppocke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