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시작과 남겨진 숙제, 불국사와 석굴암 [한ZOOM]

불국정토(佛國淨土)를 만들겠다는 신라인들의 의지가 반영된 건축물이며, 불국사(佛國寺)라는 사찰의 이름은 바로 이 불국정토에서 유래했다. 1995년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서울신문 DB.
불국정토(佛國淨土)를 만들겠다는 신라인들의 의지가 반영된 건축물이며, 불국사(佛國寺)라는 사찰의 이름은 바로 이 불국정토에서 유래했다. 1995년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서울신문 DB.
신성함이 요구되는 곳에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전설이 남아 있다. 신라인들에게 황룡사(皇龍寺)와 함께 불국정토(佛國淨土) 건설의 상징이었던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의 시작에도 그러한 전설이 남아 있다.

불국사를 만든 김대성(金大城)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대성은 전재산을 모두 부처님에게 바치고 얼마 후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김대성이 죽던 날,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는 ‘김대성이 이 집에서 환생할 것이다’라는 계시가 내렸다. 얼마 후 김문량의 아내가 왼손에 ‘대성(大成)’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황금막대를 쥔 아들을 낳았다. 김문량은 아이의 이름을 김대성(金大城)이라 지었고, 김대성의 전생 어머니를 데리고 와서 함께 살도록 했다.

다시 태어난 김대성은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곰을 사냥한 후 깜빡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김대성은 자신이 죽인 곰으로부터 위협을 당했다. 김대성은 곰에게 진심을 다해 용서를 빌었고, 꿈에서 깨어난 후 다시는 살생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시간이 흘러 김대성의 전생 부모와 현생 부모 모두 세상을 떠났다. 김대성은 부모님들을 기리기 위해 불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국보 제21호로 지정된 석가탑의 정식 명칭은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이며, 불국사 대웅전 앞 마당에 다보탑과 함께 세워져 있다. 서울신문 DB.
대한민국 국보 제21호로 지정된 석가탑의 정식 명칭은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이며, 불국사 대웅전 앞 마당에 다보탑과 함께 세워져 있다. 서울신문 DB.
그림자가 없는 탑 무영탑(無影塔)

부산 출신인 대학교 2년 선배 두 사람이 있었다. 둘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고 함께 같은 대학교에 들어왔다.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두 사람은 어깨동무를 하고 ‘부산갈매기’를 불렀다. 요즘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면 주변 사람들의 항의로 쫓겨나겠지만 그때는 그런 낭만 아닌 낭만이 가능했다.

‘부산갈매기’ 만큼 신나지는 않지만 경주(慶州)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는 역시 현인이 부른 ‘신라의 달밤’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대중가수인 현인은 성악가의 길을 걷다가 대중가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인의 종숙(從叔)이 바로 독립운동가이자 작가인 현진건(玄鎭健·1900~1943)이다. 그는 1938년부터 다음 해 1939년까지 동아일보에 ‘무영탑’이라는 역사소설을 연재했다. 이 소설에는 ‘아사달과 아사녀’ 이야기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아사달과 아사녀’ 이야기를 역사적 기록 또는 전설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현진건이 소설 ‘무영탑’을 쓰기 위해 만든 이야기이다.

신라는 석가탑을 만들기 위해 당시 신라보다 건축기술이 앞서 있던 백제로부터 ‘아사달’이라는 이름의 석공을 데려왔다. 아사달에게는 ‘아사녀’라는 이름의 아내가 있었다. 아사녀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아사달이 보고싶어 경주로 찾아갔다. 하지만 탑을 만드는 동안 경건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아사녀는 아사달을 만날 수가 없었다. 아사녀는 탑이 완성되면 연못에 그림자가 비출 것이라고 믿고 매일매일 연못을 보며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지친 아사녀는 연못에 몸을 던졌다. 석가탑이 완성된 후 아사녀가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사달은 급히 아사녀를 찾아 갔으나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후 사람들은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 불렀다.
2007년 황금돼지의 해에 불국사 극락전 현판 뒤에 숨겨져 있던 돼지조각상이 발견되었다. 불국사에서는 이 조각상에게 ‘극락전 복돼지’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극락전 앞 마당에 똑같이 생긴 동상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공개했다.
2007년 황금돼지의 해에 불국사 극락전 현판 뒤에 숨겨져 있던 돼지조각상이 발견되었다. 불국사에서는 이 조각상에게 ‘극락전 복돼지’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극락전 앞 마당에 똑같이 생긴 동상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공개했다.
부처님께서 1200년 동안 숨겨둔 돼지 한 마리

2007년 정해년(丁亥年)은 6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붉은 돼지의 해’가 10번째 되는 해라고 해서 ‘황금 돼지의 해’로 불렸다.

그런데 그해 초 불국사에서 엄청난 이벤트가 있었다. 바로 극락전(極樂殿) 현판 뒤에서 돼지조각상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처음 불국사를 만든 때가 751년이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극락전을 다시 만든 때가 1750년이다. 그렇다면 이 돼지조각상은 최소 약 260년, 최대 1260년 동안 극락전 현판 뒤에 숨겨져 있었던 셈이었다.
불국사 극락전 현판 뒤에서 숨겨져 있었던 돼지조각상. 사진 : 경주시 .
불국사 극락전 현판 뒤에서 숨겨져 있었던 돼지조각상. 사진 : 경주시 .
돼지조각상이 발견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신기한 조각상을 보기 위해 불국사를 찾았다. 게다가 이 조각상이 발견된 해가 600년 만에 찾아온 ‘황금 돼지의 해’라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의미를 전해주었다.

불국사에서는 이 돼지조각상에 ‘극락전 복돼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극락전 복돼지를 보고 만질 수 있도록 극락전 앞 마당에 똑같이 생긴 돼지상을 만들어 공개했다.
일제에 의해 석굴암 복원공사가 실패하고, 해방 후 우리 정부도 복원공사를 추진했지만 미봉책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석굴암 본존불은 밀폐된 공간에서 에어컨에 의지해 보존되고 있다. 사진 : 경주시 .
일제에 의해 석굴암 복원공사가 실패하고, 해방 후 우리 정부도 복원공사를 추진했지만 미봉책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석굴암 본존불은 밀폐된 공간에서 에어컨에 의지해 보존되고 있다. 사진 : 경주시 .
인간은 물을 이길 수 없다

1913년 일제에 의한 석굴암 복원작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석굴암 복원 담당자들은 터널공사 전문가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고대 석조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조선의 석공들에게 조언을 구하지도, 조선인들을 복원공사에 참여시키지도 않았다. 심지어 복원공사 과정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으면서 주먹구구식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석굴암의 냉각과 제습체계는 오늘날의 과학기술로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무지와 오만은 결국 문화재의 손상을 불러왔다.

해방 후 우리 정부는 석굴암 복원공사를 재개했다. 당시 유네스코(UNESCO)에서 온 전문가까지 동원되었지만 습도를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석굴암 내부를 밀폐된 공간으로 만들고 24시간 에어컨을 가동하는 방법을 적용했다.

지금도 석굴암 본존불(本尊佛)은 24시간 가동되는 에어컨 공기 속에서 앉아 있다. 에어컨의 진동 속에서 시나브로 훼손되어 가는 부처님의 고통이 하루 빨리 멈추기를 기원한다.

한정구 칼럼니스트 deeppock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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