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벙커에서 탈출하고 싶다던 우크라이나 소녀가 우여곡절 끝에 피란길에 올랐다.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의 아조우스탈 제철소에서 항전 중인 아조우 연대는 엄마 없이 홀로 지하 벙커에 숨어 있던 소녀가 안전지대인 자포리자로 대피했다고 밝혔다.
마리우폴 지하 벙커에서 탈출한 민간인 170여 명이 8일(이하 현지시간) 우크라이나군이 주둔한 자포리자에 도착했다. 자포리자는 마리우폴과 헤르손, 미콜라이우 등 러시아군 공격이 집중된 남부 지역을 겨우 탈출한 피란민이 집결하는 도시다. 데니스 프로코펜코 아조우 연대 사령관은 제철소 내에 있던 민간인이 전원 자포리자로 피란했다고 확인했다. 혈혈단신으로 벙커에 숨어 있던 알리사(4) 역시 주민 틈에 섞여 안전하게 밖으로 나왔다.
알리사는 지난달 18일 동영상 하나로 전 세계 주목을 받았다. 당시 아조우 연대는 “마리우폴과 마리우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전 세계의 관심이 필요하다”며 알리사 영상을 공유했다. 영상에서 알리사는 “벙커에서 탈출하고 싶다”, “집에 가고 싶다”, “할머니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면서도 특유의 장난기를 숨기지 못했다. 해당 영상은 수십만 조회 수를 기록했고, 덩달아 아조우스탈 제철소 상황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하지만 얼마 후 알리사에 관한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아조우 연대는 마리우폴에서 군의관으로 활약하며 다친 군인과 민간인을 치료하던 알리사의 엄마 빅토리아 오비니다가 러시아군에 적발돼 이주민 임시 캠프인 ‘여과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전했다.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 지역에 설치된 여과 수용소는 러시아가 마리우폴 주민을 자국으로 강제 이주시키기 전 사상 검증을 하는 수용 시설이다. 지난 3월 여과 수용소로 끌려갔던 한 우크라이나 여성은 워싱턴포스트(WP)에 “러시아 군인이 한 명씩 불러내 사방에서 사진을 찍고 지문을 채취했으며, 휴대전화와 비밀번호를 대라고 강요했다”고 증언했다. 군인은 물론 러시아 정보기관 연방보안국(FSB) 요원까지 민간인 신문과 심층 조사를 했다고 설명했다.
알리사의 엄마도 여과 수용소로 끌려간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아조우 연대는 9일 “알리사의 엄마는 행방불명”이라면서 “전 세계 공동체가 합심해서 알리사를 어머니 품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읍소했다.
일단 마리우폴을 탈출해 자포리자로 간 알리사는 앞으로 친척과 지낼 예정이다. 우크라이나 의회 인권감독관 류드밀라 데니소바는 “알리사의 엄마는 여과 수용소로 끌려갔지만, 알리사는 이제 안전하다”고 전했다. 데니소바 감독관은 “자포리자 군사 관리국 직원이 소녀를 임시 보호하고 있다. 수소문 끝에 찾은 친척에게 곧 소녀를 인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러시아군은 유엔아동권리협약과 제네바협약에 의해 보장된 우크라이나 어린이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데니소바 감독관은 유엔인권이사회(UNHRC) 조사위원회를 향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기간 발생한 우크라이나 아동 권리 침해를 고려해달라”고 호소했다.
한편 우크라이나 준군사조직인 아조우 연대는 러시아군이 포위한 마리우폴의 아조우스탈 제철소에서 항전을 이어가고 있다. 부상자 700명을 포함, 약 2000명의 병사가 제철소 지하 벙커와 터널에 몸을 숨긴 채 러시아군과 대치 중이다. 아조우 연대의 정보장교인 일리야 사모일렌코 중위는 "러시아는 우리의 생사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항복은 선택사항이 아니"라면서 우크라이나 정부에 안전지대로 후퇴하도록 퇴로를 마련해 달라고 촉구했다.
현재도 러시아군은 제철소에 맹폭을 퍼부으며 아조우 연대를 압박하고 있다. 일각에선 화학무기 사용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마리우폴 시의회 올렉산드르 라신 시의원은 9일 소식통을 이용해, 러시아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해 제철소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마리우폴을 장악하면 러시아는 2014년 강제병합한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와 친러 분리주의 반군이 장악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을 잇는 육상 회랑을 완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