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상징 ‘카를교’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한ZOOM]
입력 2024 01 29 10:16
수정 2024 01 29 10:16
134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체코) 국왕인 카를 4세(Karl IV· 1316~1378)는 천재 건축가 페테르 파를러(Peter Parler·1333~1399)에게 홍수로 떠내려간 다리를 재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1357년 7월 9일 5시 31분 새로운 다리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 놓였다. 그런데 왜 ‘1357년 7월 9일 5시 31분’이었을까?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전해진다.
현재 날짜 표기법으로는 ‘1357년 7월 9일 5시 31분’이 맞지만, 당시 유럽의 날짜 표기법은 일과 월의 순서가 반대였다. 다시 말해 ‘7월 9일’이 아닌 ‘9일 7월’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날짜 표기법으로 정리하면 ‘1357년 9일 7월 5시 31분’이 되며, 숫자로만 나타내면 ‘135797531’이 된다.
가운데 ‘9’를 기준으로 홀수가 좌우균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무한히 반복될 수 있는 수의 배열을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균형을 잃지 않고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은 덕분에 카를다리는 1402년 완공 후 지금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며 프라하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바츨라프 4세는 평소 소피아 왕비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비의 고해신부였던 얀 네포무츠키(체코어 Svatý Jan Nepomucký, 1345~1393) 신부를 불러 소피아 왕비가 고해성사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 말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얀 신부는 비록 황제의 명령이라고 해도 따를 수가 없었다.
“성직자가 고해성사 내용을 누설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황제의 명령이라 해도 따를 수 없습니다.”
얀 신부는 모진 고문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얀 신부는 혀를 뽑힌 후 카를다리로 끌려가서 블타바 강물 속에 생매장되었다.
얼마 후 얀 신부가 빠진 지점 근처에서 다섯 개의 별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얀 신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얀 신부의 시신은 프라하 성 안에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체코어 Katedrála svatého Víta)으로 옮겨졌고, 고해성사의 숭고한 원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얀 신부를 기리기 위한 동상이 유럽 곳곳에 세워졌다.
얀 신부가 순교한 카를다리에도 얀 신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카를다리의 양쪽 난간에는 체코인들이 존경하는 성인(聖人)들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유일하게 얀 신부만 동상으로 만들어져 있다.
동상의 왼손은 십자가를, 오른손은 순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를 들고 있다. 그리고 머리 뒤에는 얀 신부를 상징하는 다섯 개의 별 장식이 달려 있다. 유럽 곳곳에는 수많은 성인들의 동상과 석상이 세워져 있는데 얀 신부만이 머리에 다섯 개의 별 장식을 달고 있다.
마지막 방법으로 보수공사 책임자는 악마를 찾아갔다.
“다리가 원래 모습을 되찾도록 도와주시오. 도와주신다면 보수된 다리를 처음으로 건너는 생명을 당신에게 바치겠소.”
악마의 도움으로 카를교는 원래 모습을 찾았다. 보수공사 책임자는 악마와 약속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다리가 개통되는 날 주변을 막고 닭 한 마리를 풀어 이 닭이 다리를 처음 건너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한다면 사람의 생명이 아닌 닭 한 마리만 악마에게 바치면 되는 것이었다.
“책임자님께서 공사 현장에서 크게 다치셨습니다. 서둘러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보수공사 책임자의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카를교로 달려갔다. 그리고 남편을 찾기위해 카를교를 막고 있는 보초들을 제치고 들어갔고, 아무것도 모른 채 보수공사 책임자가 놓은 닭보다도 먼저 카를교를 건너고 말았다.
한정구 칼럼니스트 deeppocke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