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야경이 빼앗아간 시선…부다페스트 세체니 다리 [한ZOOM]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전 세계적으로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는 곳이다. 그리고 ‘세체니 다리’는 부다페스트의 아름다운 야경을 만들어내는 장소 중 하나이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즐기기 위해 이 다리 주변으로 모여든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전 세계적으로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는 곳이다. 그리고 ‘세체니 다리’는 부다페스트의 아름다운 야경을 만들어내는 장소 중 하나이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즐기기 위해 이 다리 주변으로 모여든다.
도시의 야경(夜景)은 바라보는 사람에게 경이로움과 평화로움을 전해주는 고마운 선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시의 야경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빛이 아닌 어둠이다. 어둠이 주는 고요와 평화가 있어야만 자결(自決) 하듯이 타오르는 불빛이 더욱 빛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그 도시의 야경을 오롯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수많은 여행자들은 어둠이 내리고 나면 낮에 쌓인 피로를 품고 그 날의 두 번쨰 여행을 시작한다.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어느 도시의 야경이 더 아름다운지 비교하는 것은 지나치게 무의미하다. 개인적으로 서울의 야경을 가장 좋아하지만, 그렇게 말할 때마다 돌아오는 반응은 의외라는 표정과 눈빛이다. 그래서 그런 반응을 하리라 예상되는 사람들에게는 서울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Budapest)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다페스트를 가로지르는 다뉴브강(도나우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의 모습이다. 국회의사당이 뿜어내는 불빛은 부다페스트 야경의 백미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부다페스트를 가로지르는 다뉴브강(도나우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의 모습이다. 국회의사당이 뿜어내는 불빛은 부다페스트 야경의 백미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부다페스트 야경의 백미 ‘국회의사당’부다페스트에 밤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다뉴브강(독일어 도나우강) 주변으로 모여든다. 다뉴브강가에서 바라본 부다페스트 야경의 백미는 역시 ‘국회의사당’이다.

밤이 온 것을 잊으라는 듯이 화려하게 빛나는 국회의사당을 보고 있노라면 저토록 화려하게 빛나는 불빛에 감탄을 멈출 수가 없다. 그리고 국회의사당이 저 불빛에 타올라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그렇게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이 만들어 내는 야경은 빼앗아 간 시선을 쉽게 돌려주지 않는다.

국회의사당에게 빼앗겼던 시선을 되찾고 나면, 다시 ‘세체니 다리’가 여행자들을 유혹한다. 세체니 다리 주변에서는 이 도시의 야경에 현혹된 수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부다페스트에 어둠이 찾아오면 ‘세체니 다리’를 빛내는 수천개의 전등은 마치 사슬을 두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다리에는 ‘체인 브릿지(Chain Bridge)’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부다페스트에 어둠이 찾아오면 ‘세체니 다리’를 빛내는 수천개의 전등은 마치 사슬을 두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다리에는 ‘체인 브릿지(Chain Bridge)’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통합의 상징 ‘세체니 체인 브릿지’세체니 다리의 정식이름은 ‘세체니 체인 브릿지’(Széchenyi Chain Bridge)이다. 어둠이 찾아오면 세체니 다리에는 수천개의 전등이 켜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사슬처럼 보여 체인 브릿지(Chain Bridge)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873년 다뉴브강 서쪽 ‘부다’(Buda)와 동쪽 ‘페스트’(Pest)가 합쳐지면서 ‘부다페스트’(Budapest)가 되었다. 두 지역의 통합은 세체니 다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뉴브강에 다리가 없었던 시절, 두 지역을 오가기 위해서는 부교나 배를 타야만 했다. 1820년 12월 부다에 살고 있었던 ‘이슈트반 세체니’ 백작이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페스트로 건너가려고 했다. 하지만 기상상황이 좋지 않아 1주일 넘게 다뉴브강을 건너지 못했다. 이후 세체니 백작은 다뉴브강에 다리 건설을 추진했고, 1842년 드디어 다리 건설을 위한 초석이 놓였다.

세체니 다리의 설계는 윌리엄 클라크(William Tierney Clark)가, 건축은 애덤 클라크(Adam Clark)가 담당했다. 두 사람은 영국인으로 템스강에 있는 런던다리를 성공적으로 건설한 경력자들이었다.
세체니 다리 입구에는 이 다리를 설계한 윌리엄 클라크(William Tierney Clark)를 기념하는 동판이 붙여져 있다.
세체니 다리 입구에는 이 다리를 설계한 윌리엄 클라크(William Tierney Clark)를 기념하는 동판이 붙여져 있다.
세체니 다리의 시련다리 건설이 한창이던 1848년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 지배에 저항하는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진압을 위해 파견된 오스트리아 부대는 부다 지역 혁명군과 페스트 지역 혁명군이 만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공사 중이던 다리를 폭파하려고 했다. 폭파계획을 알아챈 건설책임자 애덤 클라크는 다리가 폭파되지 않도록 미리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이번에는 헝가리 혁명군이 오스트리아 부대의 진격을 막기 위해 다리를 폭파하려고 했다. 이번에도 애덤 클라크는 다리의 상부 하나를 떼어내어 오스트리아 부대의 진격을 막아 혁명군이 다리를 폭파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었다. 애덤 클라크의 현명한 조치 덕분에 세체니 다리는 무사할 수 있었다.

1849년 마침내 세체니 다리가 개통되었고 부다 지역과 페스트 지역의 문화와 경제는 서서히 융화되어갔다. 그리고 1873년 두 지역을 통합한 도시 부다페스트(Budapest)가 탄생했다.
세체니 다리 입구 양 옆에는 이 다리를 상징하는 사자상에 세워져 있다. 이 사자상은 혀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세체니 다리 입구 양 옆에는 이 다리를 상징하는 사자상에 세워져 있다. 이 사자상은 혀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혀가 없는 사자세체니 다리 입구 양 옆에는 사자상이 세워져 있다. 이 사자상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다리 준공식이 열리던 날이었다.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 다리와 다리 입구에 있는 사자상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자상에 혀가 없어요!”

그러나 혀가 없는 사자상은 오히려 명소가 되었다. 지금도 세체니 다리 입구에 가면 사자상의 입 속을 들여다보며 혀가 정말 없는지 살피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헝가리에 주둔하던 독일군이 퇴각하면서 소련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다뉴브강에 놓인 모든 다리를 폭파해버렸다. 이때 세체니 다리도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4년 후 개통 100주년이 되던 1949년 세체니 다리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오늘밤도 부다페스트의 아름다운 야경을 만들어내며 이 도시를 찾은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고 있다.

한정구 칼럼니스트 deeppock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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